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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9 철학의 위안. 알랭 드 보통

 

 알랭 드 보통이 쓴 책은 다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긴 긴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이번 책의 제목은 <철학의 위안 :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인데 원제가  The consolations of philosophy인걸 보니 불안한 존재들(인기 없는 존재, 가난한 존재, 좌절한 존재, 부적절한 존재, 상심한 존재, 어려움에 처한 존재)이라는 설명은 한국에서 번역하면서 붙인듯 하다. 아마도 전작 <불안>으로 위안을 얻은 존재들에게 한번더 위로를 주고 싶은 번역자의 의도를 반영한게 아닐까... 쨌든, 각 항목에 해당되는 철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1. 인기없는 존재 - 소크라테스

2. 가난한 존재 - 에피쿠로스

3. 좌절한 존재 - 세네카

4. 부적절한 존재 - 몽테뉴

5. 상심한 존재 - 쇼펜하우어

6. 어려움에 처한 존재 - 니체

 

 각 철학자들의 삶과 책을 통하여 그들이 어떻게 불안을 극복하였는지 알아보는 건데, 다소 뻔하기도 하고 때로는 아주 깊게 공감되기도 한다. 

 

 


1. 인기 없는 존재들을 위하여

 

 청년들을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옥에 갇힌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관습과 상식(기득권)을 타파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권력자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p. 62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진실과 동의어로 보는 것은, 인기가 없는 것을 오류와 동의어로 로 믿는 것만큼이나 고지식한 짓일 것이다. 하나의 관념이나 행동이 유효하느냐 않느냐는 그것이 폭넓게 믿어지느냐 아니면 매도당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이 아니고 논리의 법칙을 지키느냐의 여부로 결정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두 가지 강렬한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두 가지 환상이란 바로 대중의 여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과 절대로 귀를 기울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 맘편한 소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리액션에 따라 나의 행동과 생각도 영향을 받는다(사이코패스가 아닌 바에야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물론 위대한 철학자 같은 분은 자신이 옳은게 너무나 명확한데다 죽었지만 몇천년간 이름을 남기기도 한다만, 일상의 소시민이 과연 인기 없이 옳은 삶을 제대로 살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다만 현재의 정치인들에게는 꼭 귀감으로 삼을 얘기이긴 하다. 연말정산이 어쨌다 저랬다, 김영란법이 이랬다 저랬다, 지금처럼 표류하는 파도 속에서 길을 찾을 수 있게.  




 

2. 가난한 존재들을 위하여


 쾌락을 추구했던 에피쿠로스 학파의 예시를 들면서, 부유함이 아닌 친구, 대화, 적당한 음식과 좋은 책 등이 진정한 행복을 준다고 말한다. 에피쿠로스의 구매 리스트는 우정, 자유, 사색이다.

 

p. 91

 말하자면 값비싼 물건들이,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따로 있는데도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할 때에 그럴듯한 해결책으로 느껴지기 떄문이다. 물건들은 우리가 심리적 차원에서 필요로 하는 어떤 것들을 마치 물질적 차원에서 확보하는 듯한 환상을 준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는 않고, 새로운 물건이 진열된 선반으로 끊임없이 이끌린다. 우리는 친구들의 우정어린 충고 대신에 캐시미어 카디건을 구입한다.

 

- 물욕이 나를 사로잡았던 신입 시절,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읽고 마음에 무척이나 위로가 되었었다. 돈을 쓰고 소유하는 것이 나를 구성해준다고 생각하고 사고서도 마음이 허했던 시절에도 이같은 얘기를 들었었다. 허나 듣는다고 잘 바뀌면 그게 사람이겠는가... ㅋ 다만 이것이 오래가지 않는 환상이고 즐거움에도 차원이 다으며(좋은 대화를 했을때 얻는 즐거움은 정말 고차원적이다!)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로다~ 할때 쯤 되면 에피쿠로스처럼 사는 게 행복할 것이다. 




3. 좌절한 존재들을 위하여

 로마 네로황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는 언젠가는 자신 앞에 닥쳐올,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서 인지하고 현명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연구한다. 


p. 149

 그의 이성은 그에게 자신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라면, 숙명으로 받아들이라고, 곧 순명을 요구했다. 심리적인 고통이 극에 달했던 몇 년 동안 세네카는 자연을 연구하는 데에 몰두했다

 

p. 112 

 철학의 임무는 우리의 바람이 현실세계의 단단한 벽에 부딛칠 때에 가능한 한 부드럽게 안착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p.116 (소제목 : 분노)

 우리가 리모컨을 찾지 못할 때 고함을 지르는 것도 리모컨이 다른 자리에 잘못 놓일 수 있는 세상을 은근히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분노란 우리 앞에 닥친 좢절이 결코 삶의 계약서에 씌어 있지 않다는 확신에서 일어난다. (결과야 제아무리 비극적일지라도) 그 확신의 낙천적인 기원을 따져보면, 거의 희극 같지만 말이다... 우리는 인간 존재의 피할 수 없는 불완전성과 화해해야만 한다.... 지나치게 높은 기대를 포기하기만 하면 우리가 그렇게 분노하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p. 122  (소제목 : 충격)

 ...그의 어머니인 마르키아는 갑작스러운 아들의 죽음에 그만 실성하고 말았다. 세네카는 깊은 동정을 표한 뒤에 상대가 마음 상하지 않게 덧붙였다. "우리 사이에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질문은 바로 비탄이라는 것이 그토록 깊어야 하고, 또한 끝없이 지속되어야 하는 것인가라는 점이오"라고.... 그런데 왜 하필 마르키아의 아들만 그녀의 곁을 떠나야 했단 말인가? 죽음은 결코 평범하지 않고 두려운 것이기는 해도 - 세네카가 과감하게 말했듯이 - 결코 비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다른 자식들의 요절에 눈길을 주지 않음으로써 마르키아는 자신이 정상이라고 인식하는 범주에 아들의 요절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는데, 그런 심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위험스럽기 짝이 없다.  

 

p. 130 (소제목 : 근심)

 전통적인 위안의 형태는 당사자를 안심시키는 것이다. 근심하는 사람에게 그가 느끼는 두려움은 지나치게 과장되었으며, 문제가 된 일들은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풀려나갈 것이라고 설명하면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위안은 근심을 치유하는 대책 중에서 가장 잔인한 형태이다. 장밋빛 예언들은, 근심에 빠진 사람에게 최악의 결과를 무방비 상태로 당하게 할 뿐만 아니라, 고의는 아닐지라도 그런 위안의 말에는 최악의 결과가 닥칠 경우 매우 비참한 것일수도 있다는 암시까지 담겨 있다.                    

 

- 나의 좌절은 세네카에게 깊게 공감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그리고 영원히 끝을 알 수 없다면! 한때 심취해있던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은 물론 분노, 충격, 근심에서 우리를 이성적으로 구해주고 잠시 숨 돌리게 해주지만, 좌절당한 당사자는 그저 시간이 지나길 바라는 것 외에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다. 나의 의지와 세상의 의지가 어긋나는 게 리모콘이 항상 있어야할 자리에 없어서 분노하는것과 사실 다를 바가 없다고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당장 화가 나고 속상한데 나라고 어쩌겠는가... 나에게 오히려 철학이 정말 위안이 될때는 겪고 지나가고 상처를 치유할 때 '왜'에 대한 통찰을 줄 때가 더 많았다.

 언제나 머릿속에 나는 불완전한 존재이며, 나쁜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으며, 좋은날이 올거야라고 대답해주는 것을 피하라고 넣고 살아야 한다. 여러번 적지만, 심리상담을 받던 시절에 오히려 저런 말을 듣고 위로를 받기는 했다. 이 산을 넘으면 평지가 나올거같죠? 아니에요 앞으로 산은 첩첩히 있어요. 언제나 그말이 맞다, 맞다 하는데 항상 넘어가기는 힘들다. 철학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으니 다행이긴 하다. 




4. 부적절한 존재들을 위하여

 당시 통념에서는 새로운 시도였던 수상록을 집필한 작가 몽테뉴는 "겉으로 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이 그 옛날에 사색에 빠졌던 사람들과 닮지 않았다고 해서 낙담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 수상록에도, 몽테뉴에게도 별 감흥이 없어서 패스



 

5. 상심한 존재들을 위하여

 염세주의자로 알려진 위대한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사랑에 대해서.


p. 259

사랑에 비관적이었던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워줄만한 상대에게 끌리는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와 건강한 아이의 생산은 근본적으로 상충하는 두개의 프로젝트인데, 사랑이라는 것이 장난을 쳐서 꼭 필요한 몇 년 동안에는 그 두가지 프로젝트가 마치 하나인 것처럼 우리를 착각하도록 만든다."


p. 263

 우리 자신에게는 잘못된 것이 전혀 없다. 성격도 혐오감을 일으키지 않고, 얼굴도 못생기지 않았다. 둘의 결합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 사람과 인연을 맺어서는 균형 잡힌 아이를 낳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쇼펜하우어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려는 의도는 없었다. 오히려 비통함을 불러일으키는 헛된 기대들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주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사랑이 우리를 낙심하게 만들 때, 사랑의 본래 계획에는 행복이란 것이 절대로 없었다는 얘기를 듣는 것은 위안이 된다.


- 결혼을 안한(못한) 자의 주장.... 앗 위로는 금물. 생산과 행복(결혼)이 꼭 하나의 톱니바퀴가 되지 않는 현대사회를 보고 쇼펜하우어는 과연 마음에 들어 했을까. 세상이 80대 20이라도 20이 자유롭게만 살 수 있다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결혼≠생산이 아닌 20들이 열심히 살아주길 바란다. 사랑도 하고 애는 따로 낳고 행복도 추구할 수 있다고. 물론 오지라퍼들의 공격은 받겠지만, 결혼하고 애 낳았다고 해서 공격을 안받는것도 아니니 (저 포도은 내가 못먹으니 분명 실거야!) 



 

6. 어려움에 처한 존재들을 위하여

 쇼펜하우어=니체가 될뻔 했으나, 좋은 우정과 대화로 긍정적인 변화를 겪은 니체는 과연 쇼펜하우어로부터 한 단계 나아간 철학자인가. 다만, 쇼펜하우어로 살래 니체로 살래 물어보면 후자를 택하긴 할 것이다.


p. 283

 쇼펜하우어에 열광했던 젊은 날의 니체는 후에 생각을 바꾸게 되는데, 완성이란 고통을 피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 아니고, 고통의 역할을 선한 무엇인가를 이루는 과정에서 겪는 자연스럽고 또 피할수 없는 단계로 인정함으로써만 달성할 수 있는 것이었다.

 

p. 290

 그 누구도 경험 없이는 위대한 예술품을 창작할 수 없고 아무런준비 없이 세속의 지위를 얻을 수 없으며, 첫 시도에서는 아주 훌륭한 연인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처음의 실패와 뒤이은 성공 사이의 간격에는, 또 우리가 언젠가 이루고자하는 인간형과 현재의 모습 사이의 간극에는 고통과 고뇌, 부러움과 굴욕감 등이 채워져야 한다. 우리는 인간 완성에 필요한 요소들을 아무런 힘을 들이지 않고는 두루 갖출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다.

                                                                                                        

- 힘든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거야~라고 예수님이 말해주는 것만 같다. 내가 싫어하는 기독교적 권선징악.... 보다는 니체가 좀 더 발전된 사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려움을 겪어야만 성장한다는 당연한 말을 반박할 수 없게 만든다. 그래 고통을 받자!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열매를 생각하면서 조금 참고 견뎌볼 때 떠올려 보려고 한다.




 샀는지 좀 됐는데 안읽히다가, 세네카에서부터 술술 읽고 몽테뉴에서 다시 지루해졌다가 탄력받아서 니체까지 간 책이었다. 세계의 철학자 6선 뭐 이런 식의 정리가 되어버렸네 실제로는 의미가 좀 더 깊었는데. 상처받거나 외로울 때 다시 펴 볼만한 위로가 되는 책으로 삼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