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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7 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딱 두 개의 키워드이다. 암실과 우연. 저마다 그런 섬 하나 씩을 가슴에 지니고 사는 것처럼 저마다의 암실이 있는 사람들이 우연히 만나 그림을 만들어가는 이야기. 조금 더 서평에 가까운 형식으로 정리해보려 한다.

 

 1990년대  DSRL이 없던 시절에는 필름마다 인화지마다 각각 다른 느낌의 사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사진사의 개성이 진하게 느껴지고 누가 보더라도 편집 의도를 알아채기 쉬운 선명한 사진들의 시대를 '빅 픽처'는 무대로 하고 있다.

 월 스트리트의 상속재산 전문 변호사로 살아가는 벤은 아내의 알 수 없는 냉담함에 하루하루 지쳐간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지만 인정하기 싫은 이유가 있다. 아내는 능력있는 어머니가 자식 때문에 자기인생을 포기하고 주부로 살아가게 된 인생을 끔찍하게도 무서워하고 그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이었지만, 두 아이를 갖게 되면서 벤은 아내를 현실로 주저앉힌다 마치 날개옷을 잃은 선녀처럼. 사진을 포기하고 변호사가 된 벤 처럼 아내는 재능없는 소설가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대신 진짜 사진사인 옆집 남자와 바람을 피우며 벤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p. 58~59

 "살다가 정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정리하고 시내로 돌아오면 돼."

 아내가 음울하게 말했다.

 "아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거야."

 아내는 우리가 뉴크로이든에 정착한 지 몇 달 후 세 번째 소설인 <말뚝 울타리>를 쓰기 시작했다. 수입이 늘어 교만해진 나는 아내에게 그만 실수를 저질렀다. 나쁜 의도는 아니었지만 정말 바보 같은 실수였다. 아내를 설득해 직장을 아예 접어버리고 소설 쓰기에 전념하게 만든 것이다.

... 아내는 뭐라 대답하지 않고 헛기침만 했다. 아내는 종일 집에 틀어박히는 걸 두려워했고, 도시 생활에서 이탈되는 걸 두려워 했고, 또다시 실패하는 걸 두려워했다. 그러나 나는 계속 설득했다. 왜 ? 아마도 우리 둘 중 한사람은 진정한 예술가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기묘한 남성우월주의에 입각해 '작가 아내'를 지원하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아내가 그냥 집에 처박혀 실패하기를 바랐는지도. 실패를 경험한 사람은 주변 사람도 같이 실패하기를 바라니까.

...마지막 출판사로부터 거절 편지가 도착했을 때 아내는 조시를 임신하고 있었고, 가족이라는 덫에 더욱 깊이 걸려들었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아내 스스로 선택한 삶이고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그래도 우울증이 찾아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살면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되는 일보다 훨씬 많아 생기는 증오와 우울함에는 대상을 찾아 그를 미워하고 남 탓을 해야지만 내가 살아갈 수 있다. 아내는 그 방법을 옆집 남자(진짜 사진가)와 바람을 피우며 찾는다.

 

 

p. 119

 내 말 잘 들어, 친구. 인생은 지금 이대로가 전부야. 자네가 현재의 처지를 싫어하면, 결국 모든 걸 잃게 돼. 내가 장담하는데 자네가 지금 가진 걸 모두 잃게 된다면 아마도 필사적으로 되찾고 싶을 거야. 세상 일이란게 늘 그러니까.

 

 옆집 남자를 살해하기 직전 이웃과 나눈 대화 중에서. 몇 시간 뒤 살인을 저지르고 모든 걸 잃게되는 남자에게 이 목소리가 메시아의 구원처럼 다가왔더라면 좋았을텐데. 소설 전반을 통해서 흐르는 주제도 위의 말과 같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지금 이대로가 전부라서 잃고 나면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p. 103

 사진에서는 우연이 전부다. 딱 맞는 순간을 기다리며 몇 시간이라도 보내야 한다. 그러나 결국 기대했던 사진은 얻지 못한다. 그 대신, 기다리는 동안 무심히 셔터를 누른 몇 장의 사진에서 뜻하지 않은 보물을 발견하게 된다.

 예술의 제 1규칙.

 '딱 맞는 순간은 절대로 예술가 스스로 고를 수 없으며, 그저 우연히 다가올 뿐이다. 사진가는 손가락이 제때에 셔터를 누르도록 하나님께 기도할 수 밖에 없다'

 

 

 살인은 우연히 발생했다. 암실에서 대화를 하다가 - 암실은 참 사적인 불가침의 공간인 듯 - 너무 화가나서 와인병을 던졌는데 옆집 남자가 죽었다. 자, 인생을 사진과 비교해 보자. 인생은 흐르나 사진은 순간이다. 인생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덧없이 지나가지만 사진은 영원히 이 순간을 잡는다. 벤이 충동적으로 옆집 남자를 살해한 그 순간으로부터 그의 삶은 영원히 변했고 앞으로 남은 그의 온 인생에 영향을 미친다. 사진처럼 그의 인생에 살인이 인화되어 언제든 따라다닐 것이다.  

 

 

 

p. 251

...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놀라게 했다. 공간을 채우고, 시간을 채울 것을 계속 찾아가는 과정이 축적되면 인생이 되는 게 아닐까?

 '물질적 안정'이라는 미명 하에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그저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라 생각하지만, 그 생각은 가까일 뿐이고, 언젠가 새롭게 깨닫게 된다. 자기 자신의 등에 짊어진 건 그 물질적 안정의 누더기 뿐이라는 걸.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소멸을 눈가림하기 위해 물질을 축적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축적해놓은 게 안정되고 영원하다고 믿도록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그래도 언젠가 결국 인생의 문은 닫힌다. 언젠가는 그 모든걸 두고 홀연히 떠나야 한다.

 

 처음 죽을 때 내뱉게 되는 말. 공수래 공수거라는 말처럼 죽음 앞에서 남겨둘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살아서 죽음을 맞는 벤의 경우는 감회가 남다를 듯 하다. 죽을 고비에서 인생의 파노라마를 본다는 속설처럼 벤은 문서적 죽음 앞에서 자기 인생을 되돌아 본다. 아들의 삶에서 지워질 구멍이자 늙음을 감추려 쌓아올린 집안 곳곳의 물건들은 죽음 앞에서 의미를 잃는다. Memento Mori가 주는 엄숙함과 간결함 속에서 벤은 이제 자기만의 암실로 걸어들어 간다.

 

p. 375

 아이를 잃고도 결혼생활이 지속되려면 부부 금슬이 아주 좋아야한다는 걸 깨달았어. 우리 부부는 그 정도로는 사이가 돈독하지 못했나봐. 팔개월 후 나는 마운틴폴스로 왔어. 벌써 칠 년이 지났지만 보즈먼에는 한번도 가지 않았어. 남편과도 전혀 연락하지 않았지. 아니, 연락할 수 없었던 거야. 극복이 안 돼 그냥 덮고 사는 거야. 그냥 눈에 안 띄게 밀쳐둔거지. 그 일은 나만의 어두운 방이 되었어. 내 머릿속 한 곳에 그 어두운 방이 늘 존재하지. 아무리 애써도 없앨 수 없는 방.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방.

 ...나는 천장을 쳐다보았다. 애덤과 조시가 떠올랐다. 잃어버린 내 아들들. 앤이 옳았다. 비탄은 자신만이 갖고 있는 어두운 방이다. 나와 앤이 다른 점은 내 스스로 자초해 그 모든 걸 잃었다는 것이다. 게리를 죽이면서 내 인생도 죽인 것이다. 나는 한때 내 인생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죽은 후에야 깨달았다.

 

 

 암실은 남모르게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나만의 공간이다. 겉으로는 웃지만 누구나 마음 속에는 암실을 가지고 살아갈 것 같다. 벤이 사랑했던 자식들을 묻어두고 새출발을 하게 되었으니 그들도 이제 암실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자식이다. 역시나, 인생은 지금 이대로가 전부이다. 돌이킬 수 없다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갈지를 생각하는게 현명하다.

 

 

p. 485

 앤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 될거야. 우리를 봐. 모든 어려움을 견디며 잘 살아왔잖아."

 앤와 함께하는 생활은 정말 잘 이루어졌다. 결혼은 리듬이 전부다. 우리는 리듬을 잘 타면서 살고있다. 나는 아들 잭을 사랑한다. 가족과 함께 있으면 즐겁다. 사소한 말다툼은 피한다.... 물론 게리와 얽힌 기억은 우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떠나고 싶은 충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날은 애덤의 생일이었다. 나는 저녁 여덞시에 앤에게 근처 세븐일레븐에서 맥주를 사오겠다고 말하고 나서 집을 나섰다. 그러나 막다른 길에 나오자마자 나는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새벽 두 시에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했다. 운이 좋으면 10시까지 솔트레이크에 갈 수도 있겠지. 그 뒤에는? 그 뒤에는? 나는 계속 나 자신에게 물었다. 그러나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길의 종착지는 오직 집뿐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나는 막다른 길로 들어가 진입로에 차를 세웠다. 현관문은 열려있었다. 앤이 양팔로 잭을 안고 햇살 아래 서 있었다. 앤의 얼굴은 밤새 한숨도 못잔 표정이었다. 그러나 앤은 화를 내지 않았다.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아니, 사실,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앤은 그저 나에게 지친 미소만, 지친 어깻짓만 해보였을 뿐이다. 그 미소, 그 어깻짓은 이렇게 말했다.

 '다 이해해. 다 이해해.....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앤은 벤을 현실에 살게만드는 사람이다. 그녀는 재정적으로 심리적으로 벤을 부양하는 처지에 있으므로 맨 처음의 벤과 아내의 관계에 필적할 만 하다. 그리고 지금 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벤에게는 '인생은 이대로가 전부야'라고 할만한 인생이 되어버렸다. 떠날 곳도 없고 암실로 숨을 수도 없는 인생 그 자체를 살고 있다.

 

 

 전반적으로 어려운 부분 없이 빠르게 훑고 넘어갈 만 했고 매우 깊은 생각을 하도록 만든 책은 아니었다. 다만 소설을 읽고 오랜만에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기회가 있었는데, 빅 픽처 중 여러 부분들이 생각이 나서 한두개의 키워드로 정리를 해봐야지 벼르고 있었다. 우연과 우연이 겹치는 데에 집착하지 말고 인생은 그럴 뿐, now and here일 뿐 생각하고 살면 지친 미소 정도는 띄우고 살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