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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30 유리 동물원. 테네시 윌리엄스


 미국 희곡 수업에서 처음 접했던 작품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였고, 그때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유리동물원이라는 작품이 나중에 무대에 오르면 꼭 봐야 겠다고 마음 먹었던 일이 5년 전. 올여름, 명동예술극장에서 유리동물원을 무대에 올려 연극으로 먼저 감상했고 후기 이벤트 당첨!으로 책을 받아 읽게 되었다. 가족사에 일그러진 자아나 가족 사이에서 묘하게 흐르는 긴장감 같은 걸 좋아해서 무척이나 즐겁게(?) 읽었다.

 일단 연극을 본 소감부터 먼저 적자면, 명동 예술극장의 무대와 장치는 정말 수준이 높았고 극에서 특히나 좋았던 건 오직 첼로 한 대로만 모든 음악을 대신했다는 점이다. 덕분에 인물들의 감정이나 극의 전환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도 공감되게 잘 표현되었다. 분노하는 톰의 심리상태나 댄스홀을 바라보며 쓸쓸하게 독백하는 모습에 곁들여지는 첼로가 기억에 남는다.

 극 중 세 인물 아만다, 로라, 톰 중에서 사실 제일 공감하는 인물은 아만다였다. 원래 극의 주인공인 로라는.. 나에겐 순수하지만 힘빠지고 수줍지만 때로는 뻔뻔하기도한 그런 여자였다. 아만다는 더한 뻔뻔스러움과 유난함으로 극 전체를 휘어잡는(특히 연극을 보고 나왔더니, 김성녀 배우님의 연기가 정말 좋았다. 그야말로 찰졌음) 엄마였고 톰을 휘어잡는 거머리이다. 마지막으로 아들, 경제적 기둥, 톰. 지긋지긋한 집을 떠날 때 나도 후련함을 느끼고 동시에 유년시절이랄까 순수함이랄까 이제 세상에 닳고 닳는 일만 남았구나 싶은 쓸쓸함이 같이 느껴졌다. 누나의 촛불을 끄며 완전히 안녕을 고하는 톰이 자유롭게 살기를 바란다.

 

 


p.45~50

아만다 : 아이고! 난 다리에 힘이 쑥 받쳐서 주저않고 말았다! 그랬더니 냉수를 갖다 주더구나! 수업료 50달러도 우리들의 미래도 계획도 너에게 건 나의 꿈도 희망도 깡그리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어...그럼 앞으로의 인생을 어떡할 셈이지? 집안에 처박혀 지나가는 축제 행진이나 구경하고 있을거냐? 유리 동물이나 만지작 거리며?...이제 남은 길은 남에게 의존하는 도리밖에 없겠구나. 변변한 작업하나 갖지 못한 미혼모의 신세를 난 너무나 잘 안다. 남부에서 살 때 그런 비참한 꼴을 실컷 보았어 여동생의 남편이나 올케에게 얹혀 찬밥을 먹고 사는 노처녀들.
직장생활에 맞지 않는 처녀들은 착한 신랑감을 만나 결혼해 버리는게 상책이야. (다시 활력을 되살려 일어서며 이왕지사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얘야, 너도 그래야만 돼

- 부모의 세계가 참 좁다. 자기가 경험해 온 시간과 공포에 갇혀서 그 밖의 어떤 것도 보지 못한다. 부모는 자신이 보았던 최선의 직업(타이프라이터)을 자식이 갖기를 바라며, 자신의 꿈이 자식에게 좌절되었을 때 그 무엇보다 큰 분노를 느낀다. 내 경험에서는, 사회 경험이 없는 어머니 쪽이 자아실현을 본인이 헌신했던 자식에게서 더욱 이루고 싶어했고 나와는 상관없이 좌절도, 희망도, 대책도 다 어머니 혼자서 느끼는 거였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역마살 있는 가난하고 매력적인 남자를 만나 아이 둘을 낳고 그 남자는 어떠한 경제적인 지원도 주지 않은 채 떠나 버렸다. 아만다의 인생에서 남자는 그 하나뿐이었고, 경제적인 역할은 이제 아들이 대신하고 있다. 로라와 톰에게 기대를 거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너는 그래야만 해 너는 엄마의 말대로 해야되 하며 자식을 몰아 붙이는 꼴은 결국 본인의 욕심이고 이기심일뿐이라고 생각한다.  

 

 

 

p. 59

아만다 : 그러다 모가지라도 잘리게 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냐? 우리 모두의 밥줄을 끊어 놓으려는 거냔 말이다. 네가 직장을 잃게 돼봐라, 그땐 우리 입에 거미줄 치게 돼

톰 : 이것 보세요! 어머닌 내가 그 놈의 창고에 환장한 줄 알아요?... 한 달에 65달러를 벌기 위해 난 하고 싶은 것, 모든 꿈을 포기하고 말예요! 한데도 어머니 - 내가 나 자신만 생각한다고 말하죠. 이것 보세요. 나 자신만 생각했다면 어머니, 난 벌써 아버지 뒤를 쫓았을 거야 - 가 버렸다고요! ...어머닌 빗자루를 타고 블루 마운틴으로 올라가겠죠, 17인의 청년들과 말예요! 어머닌 늙고 - 추한 - 마귀라고요


- 이 말을 듣고 아만다는 정말로 큰 충격에 빠져(몸을 부르르 떨고 분노로 말을 잇지 못할 정도이다) 톰과 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어머니가 젊은 시절 겪었던 어려움을 짐작도 할 수 없는 자식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란 대개 이렇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톰의 발목을 붙잡는건 아만다가 맞다. 그리고 나는 톰이 아만다보다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만다야말로 이기적이고, 제 살기 위해서 자식을 창고에 꼬박꼬박 나가게 하고, 전등갓을 바꾸고 로라의 새옷을 사는데 기쁨을 느끼지만 톰의 눈에는 그게 다 쓸데없는 허영이고 계속해서 자신을 창고로 출근하게 만드는 원천일 뿐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돈이 많아지면 서로 만족할 수 있을까? 문제는 문제일뿐, 돈은 그 문제를 모여주는 하나의 상징일 뿐, 이 가족은 이미 속부터 깨져있다.

 

 

p. 73

아만다 : 지난 몇 년 동안 쭈욱 이 어미는 외로운 전쟁을 치러 왔단다. 지금은 너라는 대들보가 있잖니! 제발 부탁이다, 넘어져선 안 된다, 이를 악물고 살아야한다! .. 크림을 넣도록 해.

톰 : 크림은 안 넣겠어요.

아만다 : 크림을 넣어 식히라니까.

톰: 아뇨! 괜찮아요.블랙 커피가 좋아요

아만다 : 나도 안다. 하지만 블랙 커피는 너에게 좋지 않아. 건강에 좋은 거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만큼 노력을 해야지. 이 어려운 시대에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 자신 뿐이야... 그러니까 이건 중요한 일이잖니? 너와 의논을 좀 하려고 네 누이를 내보냈단다...네가 선원 조합에서 받아 온 편지를 보았다. 나도 장님 귀머거리가 아냐. 좋다. 떠돌아다니고 싶거든 그렇게 하려무나! 하지만 누군가가 네 몫을 하기까진 안돼!

톰: 그게 무슨 말씀이죠?

아만다 : 내 말은 로라에게 적당한 사람이 생겨 그 애를 돌봐주고, 결혼을 하고, 제 집을 마련하고, 독립된 생활을 하게만 된다면 - 넌 네가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다는 뜻이다. 육지건 바다건 바람 부는 대로 말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네 누이 문제를 마무리지어 놔야 한다. 난 내 욕심만 차려서 이런 말을 하는게 아냐... 이기심을 버려야 해! 넌 항상 너, 너 자신, 자신의 일밖에 모른다니까!


- 나를 미치게 했던 블랙커피 장면과 머리빗기 장면... 좀 내버려 두면 안되나 으아아아아. 품 안의 자식인가. 아만다는 '은근히 남부스타일로' 강압적이다. 톰은 물론 곧이곧대로 따르지는 않지만 들을때까지 말하는 저 집요함이란. 그야말로 사람 짜증을 돋군다. 어쨌건간, 아만다의 이기심이 최고조로 드러났던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네 몫을 하기까진 안돼. 누군가가 너 대신 돈을 벌어오기까진 안돼. 돈만 벌어오면 아들이든 사위든 사실 상관없던건데, 그것때문에 지금까지 죽도록 톰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니. 내가 너무나 아만다의 캐릭터에 공감이 많이 되서 이렇게 적어놓은 바가 많지만, 사실 로라는 아만다보다 더욱더 은근히 톰의 발목을 붙잡는다. 착하고 순수한테 내 어려움은 모른 척 하는 사람. 도와주겠다고 나서봐야 아무런 도움이 안되서 너를 미워하는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사람이 바로 로라다. 어쨌거나 두 짐 때문에 톰은 떠날 수가 없다.

 

 

 

p. 156

짐 : 내가 로라의 괴로움이 무언지 말해 볼까? 그건 일종의 열등감이야! 열등감이 뭔지 알아? 자기 자신을 업신여기는 걸 열등감이라고 해. 난 열등감을 이해해. 나 역시 열등감에 휘말린 적이 있었거든. 물론 내 경우는 로라의 경우처럼 심각하진 않았지만....거의 눈에 띄지도 않은, 대수롭지도 않은 신체적 결함을 가지고. 공연히 쓸데없는 망상을 몇천 배로 확대한 거지 뭐야! 내가 로라에게 강력히 충고하고 싶은 게 무너지 알아? 자신이 어떤 점에선 남보다 훨씬 뛰어났다는 거야!

 

- 제일 정상적인 청년이었던 짐. 사실 이 가족과 함꼐 등장했으므로 짐은 일종의 자신감 과잉 환자같아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보통사람이 가짐직한 바람직한 사고방식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다. 작가가 로라(실제 본인의 누이겠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표현한 대목. 개성의 상대성!

 

 

 

p. 164

짐 : 저 저 저런. 깨졌나?

로라: 이제 보통 말처럼 돼 버렸어요.

짐: 그럼 그게 부러져 나갔군 -

로라 : 뿔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보통 말로 변했으니 잘된거죠 뭐.

짐 : 용서받지 못할 실수를 저질렀군. 로라가 가장 좋아하는 유리동물이었는데.

로라 : 좋다한댔자 별것 아니에요, 괜찮아요. 유리란 쉽게 깨지는 건데요, 뭐.

 

- 로라가 은근히 이기적이라고 한 대목. 이 정도로 쉽게 포기할만한 것(유리 유니콘)이었으면서 그토록 깨질까 닳아질까 애지중지 했던걸. 나는 사실 다소 배신감을 느낄 정도였다. 본인의 상황이나 마음가짐에 따라서 소중/찬밥의 경계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데 그 아무것도 아닌걸 지켜주기 위해서 톰은 매일같이 창고에 나가서 일하는 시인이 되어야만 했다.

 

 

 

p. 184

톰 : 저는 몸을 돌리고는 누나의 눈을 들여다봅니다. 오 로라, 로라, 난 누나를 버리려 했어, 그럴 작심이었는데 한시도 누나를 잊을 수가 없는거야! 전 담배를 꺼내죠. 거리를 건너고, 영화관이나 바로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가까이 있는 낯선 사람에게 얘기를 합니다 - 누나의 촛불을 끌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려는거죠! 왜냐하면 오늘날은 번개가 세계를 밝히기 때문이죠. 누나, 누나의 촛불을 꺼요 - 그럼 안녕...

(Then all at once my sister touches my shoulder and I turn around and look into her eyes. … Laura. Laura. I tried so hard to leave you behind me but I am more faithful than I intended to be. I reach for a cigarette, I cross a street, I run to the movies or to a bar. I buy a drink. I speak to the nearest stranger. Anything that will blow your candles out. For nowadays the world is lit by lightning. Blow out your candles Laura. And so goodbye.)

- 사실 연극 보면서 마지막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아 혼란스러웠고 다시 책으로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번개가 세계를 밝히기 때문에 누나의 촛불을 끈다... 촛불보다 더한 빛이 세상에 나오니 있었고 누나의 초라하고 작은 빛은 이제 나의 양심을 괴롭힐만큼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나는 이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 의미가 궁금해서 원문을 찾아서 붙여둠. 진짜 번개네. 

 


 왜 그렇게 공감이 많이되었을까. 나를 톰에게 투영한 것일까. 의문은 끊임없이 들지만 어떤 의미로는 좀 후련하기도 했다. 부모와 자식간에 느끼는 감정들. 아주 가까운 사이에 불화가 생기면 그만큼 관계와 인간 자체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되고 그게 내가 성장하는 자양분이 되기도 하나보다. 사라진 유니콘의 뿔, 남들과 같아져 버린 말, 그리고 촛불을 끄는 동생. 원작을 읽으니 극 중간 중간에 스크린에 쏘아지는 '사랑이라니!' 등의 대사가 있었으면 좀 더 장면에 의미가 더해졌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살짝 남는다. 그래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은, 나의 유리 동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