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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1 공항에서 일주일을. 알랭 드 보통

 알랭 드 보통의 책은 왠만하면 다 읽자고 생각하고 있어서 이번에도 이 책을 집어들었다. 예전에 읽었던 김연수의 <여행할 권리>를 떠올리면서 시작했는데, 다른 얘기였더라는.. 그야말로 작가가 일주일동안 공항 안에서 살면서 겪었던 단상들을 특유의 감성으로 얇은 책 속에 에세이 형식으로 적었는데, 나의 기억을 위해서 몇 구절 옮겨 놓고자 한다.

 

 

 

p. 45

 출발 라운지의 거대한 공간은 현대 세계 운송의 중심답게 신중하게 사람들을 관찰할 기회, 타자의 바다에서 자신을 잊을 기회, 눈과 귀가 제공하는 무한한 이야기의 단편들을 바탕으로 상상을 펼칠 기회를 예고했다. 공항 천장의 튼튼한 강철 버팀대들을 보면, 19세기 커다란 기차역의 비계를 떠올리며 경외감을 맛보게 된다. 모네의 <생 라자르 역>과 같은 그림에 나타나는 그 경외감은 이런 강철 팔다리로 이루어진 빛이 가득한 공간, 그것도 낯선 사람들이 가득한 공간에 처음 발을 딛는 수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을 것이다. 이런 건물에 들어오면 사람들은 인류가 거대하고 다양하다는 사실을 단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다

 

- 서울역과 인천공항의 첫 느낌도 나에게는 이러했다. 이제 여기서 발길을 뗄 수 있구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현대의 모든 기술이 집약되어 만들어진 듯한 세련된 공간의 이미지.

 

 

 

p. 76

 우리가 미학적이나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기쁨을 끌어내는 능력은 이해, 공감, 존중 등 그보다 더 중요한 여러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요구를 먼저 충족시켜야 한다는 사실에 위태롭게 의존하고 있다. 우리가 헌신하고 있는 관계가 몰이해와 원한으로 물들어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드러나면 우리는 종려나무와 하늘색 수영장을 즐길 수가 없는 것이다... 불을 피우거나 쓰러진 나무로 초보적인 카누를 만들려고 애쓰던 인간 역사의 초기에, 우리가 인간을 달로 보내고 비행기를 오스트레일리아에 보내고 난 뒤에도 오랫동안 우리 자신을 견뎌내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불끈 성질을 낸 것을 사과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 이렇게 고생을 할 것이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 테크놀로지로 점철된 공항에서 결국 그 기분과 휴가를 만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비행기가 아닌 동행인의 행복한 기분.. 뭐 이정도의 설명이다. 비행기가 발명이 됐거나 안됐거나, 나의 불행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건 아니다.

 

 

 

p. 111

 지난 수십년간 항공 엔지니어들의 많은 성취에도 불구하고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의 시간은 통계적으로 볼 때 집에서 텔레비전 앞에 앉아 조용히 보내는 시간보다는 재난의 서곡이 될 가능성이 여전히 더 높다. 따라서 비행기를 타는 것은 우리 자신의 해체를 앞둔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가장 잘 보내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곤 한다... 비행이라는 의식은 겉으로는 세속적으로 보이지만, 이 비종교적인 시대에도 여전히 실존이라는 중요한 주제 그리고 세계의 종교이야기에 그 주제들이 굴절되어 나타난 모습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 죽기 마지막 시간을 거의 면세점 쇼핑으로 보내기는 한다만... 가끔 그 사이에서 곧 내가 갈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레임과 불안감(여권 잘챙겼나, 호텔 위치는 어디인가, 로밍은 어떻게 되나)를 느끼는 교차점을 발견한다.

 

 

 

p. 185

 그럼에도 수화물과 재결합을 할 때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우울한 느낌이 찾아온다. 거추장스러운 것들로부터 벗어나 공중에서 몇 시간 동안 밑에 보이는 해안과 숲에서 자극을 받으며 희망한 계획을 세우던 승객들은 수화물을 찾는 곳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벨트를 보면 자신의 존재와 관련된 물질적이고 부담스러운 모든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수하물을 찾는 곳과 비행기라는 대조적인 두 영역은 어떤 본질적인 이중성을 상징한다. 물질과 영혼, 무거운과 가벼움, 몸과 영혼의 이분법이 존재하는 느낌이다.

 

- 돌아올 때면 가끔 영영 길을 잃어버리던가 천재지변에 의해서 다시 여행지로 귀환한다거나 헛된 소망을 품게될 때가 있다. 게다가 짐을 다시 만나게 될때면, 자유로웠던 영혼이 땅으로 돌아와 붙어버리는 느낌마저 들어버리니. 영원히 떠나면 집에 회귀하고 싶을텐데, 항상 돌아올 곳을 정해놓고 다녀서 그 짧은 외도가 아쉽기만 하다.

 

 

 

p. 205

 여행자들은 곧 여행을 잊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은 사무실로 돌아갈 것이고, 거기에서 하나의 대륙을 몇 줄의 문장으,로 압축할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다시 두브로브니크와 프라하에 흥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다.우리가 읽은 책, 일본의 절, 룩소스의 무덤, 비행기를 타려고 섰던 줄,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 등 모두 다. 그래서 우리는 점차 행복을 이곳이 아닌 다른 곳과 동일시하는 일로 돌아간다.

 

- 여행의 기쁨과 비슷한 결말로 이어지는데... 잊고 또 바보같이 여러번 도피하더라도 그게 좋다. 좋다는 걸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좋으니까, 앞으로도 나는 저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며 여행자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