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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5 한 걸음을 걸어도 나답게. 강수진


 최근 강수진 단장의 모습에서는 발레리나로서의 삶을 졸업하고 이제 경영인(국립발레단 단장)으로서의 삶에 집중하는 느낌이 많이 든다. 다만 양쪽 모두에게 재능이 있기란 힘든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p. 13

 10대 때는 그저 발레가 좋았다. 20대 때는 무조건 열심히 했다. 30대 때는 내가 뭘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춤을 췄다. 그리고 40대가 되고서야 비로소 무대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무대를 즐기게 되자 더 자유롭게 배역에 빠져들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40대에 연기한 15살 줄리엣이 20대에 선보인 줄리엣보다 더 순진무구했다. 역할에 빠져들면 나이는 사라지고, 캐릭터만이 살아 춤춘다.



 

p. 43

 발레 거장의 확신에 찬 말에 부모님도 마침내 어린 딸의 유학을 허락하셨다. 뒤늦게 안 사실인데 모나코로 돌아간 마리카 부모님이 나를 도로 한국으로 데려갈까 봐 걱정되었는지 아버지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셨다고 한다.

 "수진을 제게 보내주시면 수양딸 삼아 조금 오래 데리고 있으면서 제대로 키워내고 싶습니다."



 

p. 77

 무대에서도 삶에서도 나는 그저 들러리인 것 같았다. 첫 2년간은 군무로도 거의 무대에 서지 못했다. 클래스도 충실하게 듣고, 연습도 빠지지 않았지만 마음이 그곳에 있지 않았다. 무기력한 상태에서 우울증이 찾아와 연습량은 줄고 폭식으로 살이 10kg이나 쪘다.

 ...리허설도 없이 갑작스레 대역으로 무대에 서야 하는 상황. 무대 위에서 나는 눈을 뜬 채로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아니 악몽이기를 바랐다. 한 몸처럼 움직이는 합이 중요한 군무에서 나 혼자만 계속해서 틀린 동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p. 162

 매일 남편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1년동안 치료를 잘 받으면, 다시 발레를 할 수 있을거야"

 "1년 뒤에 다시 무대에 오르면 지금 나를 사랑해주는 관객들이 여전히 나를 사랑해줄까?"

 "글쎄, 하지만 지금 1년을 쉬지 않으면, 평생 관객들 앞에 설 수 없을 거란 것만은 분명해."



 

p. 197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툰츠는 내가 발레단에 처음 출근한 날, 나에게 반했다. 얼떨떨하지만 결연한 표정으로 극장 계단에 서 있던 동양인 여자를 본 순간 자신의 세상은 정지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언젠가 나의 아내가 될 것이다. 내 인생의 파트너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툰츠는 바람둥이답지 않게 나를 오랫동안 지켜만 봤다. 심지어 2년동안 인사 한 마디, 말 한 마디 나눠본 적이 없었는데도 언제나 지켜만 봤다고 한다. 내가 남자에게는 별 관심이 없고, 발레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처럼 오로지 발레 연습에만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보면서 처음에는 혀를 내둘렀는데, 곰곰이 살펴보니 발레에 대한 애정뿐 아니라 인생의 중요한 과도기를 지나고 있는 듯한 비장함과 결연함이 엿보였다고 한다. 그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기다리기로 했단다.



 

p. 236

 2008년이었다. 나는 왼발 뼈가 완전히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철심을 박는 대수술을 해 오른쪽 다리만 겨우 사용할 수 있었다...하지만 그는 베스트 파트너였다. 내 발이 땅에 닿지 않도록 온갖 기교로 나를 공중에 들고 다녔다. 평소 연습 때는 땀을 잘 흘리지 않는 그가 땀을 비 오듯 흘렷고 숨소리도 거칠었다. 중심을 잘 못 잡는 내 사정을 고려해 온갖 동작으로 나를 받쳐주었다. 최선을 다해 내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었다. 나의 컨디션 난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환상적인 무대를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