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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1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한창 빨간책방에 빠져있을 때, 빨간 책방을 듣기 위해서 샀던 책. 근데 생각보다 별로 재미는 없었고 반년도 넘게 지나서 이제 나는 빨간책방을 안듣게 된지가 오래이다. 빨간책방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다가 사그러들게 된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지만, 어쨌든 이 책을 읽었던 때를 떠올려 보면서 기억에 남았던 구절을 몇 개 뽑아 본다. 



p. 44

 "여기 있게 되면서부터 왠지 모르지만 내가 이 광산에서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는 그 말에 말문이 막혔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지만, 나는 갑자기 식은땀에 흠뻑 젖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여기서 죽으리라는 그의 두려움에 전염되고 말았다.


- 고작 10대인데, 재교육이라는 미명 하에 앞으로 몇 년이나 시골에서 썩게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눈 앞에 둔 10대들은 지금 당장 죽음을 맞이한 것과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인생은 이제 막 시작되었는데 보이는 미래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무섭다. 오늘이 4.16인데 2년 전 희생당한 세월호의 고등학생들이 다시 생각나면서, 바다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사그러든 생명들이 너무나 안타깝고 슬프다.




p. 82

나는 <위르쉴 미루에>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들을 베껴놓기로 했다. 책을 베끼고 싶은 마음이 들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방 안을 뒤져 종이를 찾아보았지만 부모님에게 편지를 쓸 때 사용할 종이 몇 장밖에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점퍼의 양가죽에 직접 옮겨 쓰기로 했다.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주었던 그 점퍼의 겉면에는 길고 짧은 양털이 뒤섞여 있었지만, 안쪽은 털이 없어 매끈한 가죽이었다. 안쪽 가죽은 군데군데 갈라지거나 해져있어서 글을 쓸 자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옮겨 쓸 만한 본문을 선택하는데 한참이 걸렸다. 나는 위르실이 최면상태에서 여행을 떠나는 장면을 쓰기로 했다. 나도 위르실처럼 침대에 잠든 채 오백킬로미터나 떨어진 우리 집에 가서 어머니가 뭘 하고 계신지를 보고, 또 부모님과 함께 저녁 식탁에 앉아 그분들의 앉은 자세라든가 반찬이나 접시 색깔을 관찰하고 음식 냄새를 맡고 그분들의 대화를 들어보고 싶었다.


- 또한 10대이기에 더욱더 무언가에 미친듯이 빠져들게 된다. 농사나 짓던 산골에서 얻게 된 단 한권의 책은 발자크의 <위르실 미루에>이다(사실 읽어본 적은 없다). 화자는 그 책에 감정이입을 하다 못해 본인이 입고 다니는 양가죽 점퍼에 한 문장씩 필사하면서 책 자체에 완전히 빠져버리게 된다. 나도 이제 10대는 아니지만, 책에 몰입할 때의 재미와 기쁨을 알고 있어서 화자가 하듯이 문장들을 블로그에 베껴놓는다. 지금보다 세계가 좁았던 10대에는 나도 그 느낌이 더욱 간절하고 중요했었다. 몰입, 내것으로 만들기, 나만의 것으로 삼기. 




p. 187~196

 그래, 두 사람이 홀딱 벗은 걸 봤지. 난 일주일에 한 번씩 뒷산 골짜기로 나무를 하러 가는데, 그날도 평소처럼 급류가 흐르는 늪을 지나갔거든.. 맙소사! 두 사람은 물 속에서 교미를 하고 있었던거야.

... 다시는 내가 쓸 일이 없을 그 열쇠들을 보면서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어... 절망에 빠진 나는 깊은 물속에다 그 열쇠꾸러미를 던져버렸어.

 그러나 그애가 열쇠고리를 건지려고 접영동작으로 물속에 뛰어든거야... 곧이어 수면으로 올라와보니 그애가 반작이는 진주알 같은 물방울이 잔뜩 맺힌 열쇠고리를 입에 물고 있었어.

 그애는 내가 언제든 이 재교육을 마치고 산골을 나가게 되면 그 열쇠들을 쓰게 될 거라고 믿는 유일한 사람이었어.

 그날 오후 이후로 우리는 늪에 갈때마다 습관처럼 열쇠고리 찾기 놀이를 했지. 내가 그 놀이를 좋아한 건 내 미래를 점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투명한 나뭇잎 옷을 입고 물속에서 관능적으로 몸을 흔드는 그애의 매혹적인 알몸을 감상하기 위해서였어.


- 산골에 유배되어 있어도 10대이기에 아름다운 사랑을 한다. 이 부분은 목격자와 두 커플 총 3명의 시각으로 각각 쓰여져있는 부분이었는데, 같은 장면에 대해서 세 사람의 시각을 돌아가면서 보여주는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바느질 처녀와 사랑하는 와중에도(현재) 언제 돌아갈까 돌아갈 수 있을까 걱정(미래)이 앞선다. 그 열쇠고리를 다시 가져다 주는 바느질 소녀는 과연 걱정의 답이 되어있을까? 답은 찾을 수 없지만 매혹적인 알몸은 찾게 되었다. 




p. 246 252

 재봉사의 말에 의하면, 그의 딸은 면의 공안위원회에서 장기 여행에 필요한 각종 서류와 증명서를 비밀리에 신청했다는 것이다. 그러곤 떠나기 전날에야 비로소 자신이 새 삶을 살기 위해 대도시로 떠나기로 했다는 계획을 아버지에게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자네들도 그 일을 아느냐고 물어봤지. 그랬더니 자네들은 모른다면서 거처가 정해지면 편지를 쓸 생각이라고 하더군."

...

"응, 대도시로 가겠대. 그 애가 발자크 얘기를 했어... 발자크 때문에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는 거야. 여자의 아름다움은 비할 데 없을 만큼 값진 보물이라는 걸."


- 두 청년에 의해서 계몽된 바느질 처녀는 결국 그 산골을 몰래 떠나기로 한다. 도시에서 시골로 와서 축소된 세계에서 발견한/바느질 처녀에게 소개된 발자크 만이, 시골에서 도시로 떠나면서 앞으로 더 큰 세계를 경험하게 될 바느질 처녀와 멈춰있는 두 청년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된다. 두 청년이 가장 이루고 싶었던 걸 바느질 처녀는 이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