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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5 고양이 요람. 커트 보니컷


p.27

 아버지는 끈으로 고양이 요람을 만들고서 스스로 놀라셨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어린 시절이 떠올랐는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서재 밖으로 나와 전에 없던 행동을 하셨습니다. 저와 놀아주려고 하셨죠. 그전에는 저와 놀아주신 적이 한 번도 없을뿐더러 저에게 좀처럼 말도 걸지 않으셨거든요.

 그런데 그날은 양탄자 위 제 옆에 무릎을 꿇고 앉으시더니 치아를 드러내보이며 제 얼굴에 대고 그 얽힌 끈을 흔드셨죠. "보여? 보여? 보여?" 아버지가 물으셨어요. "고양이 요람이야. 고양이 요람 보여? 귀여운 야옹이가 어디서 자고 있는지 보여? 야옹. 야옹."

 아버지의 얼굴의 땀구멍이 달 표면의 분화구만큼이나 커 보였습니다. 아버지의 귀와 콧구멍은 털로 그득했죠. 시가 연기에 찌든 아버지에게서 지옥의 아가리 같은 냄새가 났어요. 그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아버지는 제가 본 가장 추한 생물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모습이 자꾸만 꿈에 나타납니다.


 


p.34

 그러다가 머리를 다시 안으로 넣었고, 나중에도 그 야단법석에 대해서 전혀 묻지 않았어요. 사람은 아버지의 전공 분야가 아니었거든요.

...

 폭탄이 터진 후에, 그러니까 미국이 폭탄 하나로 도시를 통째로 쓸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확실해진 후에, 어떤 과학자가 아버지를 돌아다보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제 과학이 죄악을 알게 되었군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죄악이 뭐요?"


 


p.90

 "그런데, 원자폭탄 따위를 만드는데 일조한 사람이 대체 어떻게 무죄할 수 있소? 그리고 자신의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사랑과 이해심 부족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좋은 사람일수가 있느냐는 거요..."

 그가 몸서리를 쳤다. "가끔 그자가 죽은 채로 태어난 건 아닐까 궁금하다오. 나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그토록 무관심한 인간을 본 적이 없소.윗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돌처럼 차갑게 죽어 있는 자들이 너무나 많소. 이따금 그게 이 세상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p.135

...배는 가라앉고 말았다. 존슨과 매케이브는 알몸뚱이로 용케 해안까지 헤엄쳐갔다. 보코논은 그 모험을 이렇게 기록한다.


성난 바다가 던져올린

물고기 한 마리.

나는 육지에서 숨을 토했고

그리하고 내가 되었네.


 존슨은 벌거숭이로 낯선 섬에 상륙하게 된 신비로운 경험에 매료되었다. 그는 알몸으로 바닷물에서 나오면서, 이 모험을 끝까지 해보기로, 한 인간이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는지 두고보기로 결심했다.


 


p.155~158

 매케이브 상병과 존슨이 샌로렌조를 시배하게 된 것은 결코 기적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샌로렌조를 차지했다가 언제나 쉽게 남에게 넘겨주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무한히 지혜로운 하느님이 그 섬을 무가치한 곳으로 창조했기 때문이었다.

...

 요새는 한 번도 공격을 받은 적이 없었고, 제정신인 사람은 누구도 그곳을 공격해야 할 까닭을 알지 못했다. 요새는 어떠한 것도 방어한 적이 없었다. 요새를 건설하다가 천사백 명이 죽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천사백 명 중에서 절반가량은 열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공개 처형을 당했다고 한다.

...

1992년에 매케이브와 존슨이 도착해서 자신들이 섬을 떠맡겠다고 선언하자, 캐슬 설탕은 역겨운 꿈에서 깨어난 듯 흐늘흐늘 철수해버렸다.

 필립 캐슬은 이렇게 기록했다. "샌로렌조의 새로운 정복자들에게는 진짜로 새로운 특징이 적어도 하나는 있었다. 매케이브와 존슨은 샌로렌조를 유토피아로 만드려는 꿈을 꾸었다.

이를 위해 매케이브는 경제와 법률을 정비했다.

존슨은 새로운 종교를 창안했다.

캐슬은 다시 <칼립소>를 인용했다.


나는 만물이

이치에 맞아 보이기를 바랐다네.

그러면 우리 모두가

긴장을 풀고 행복할 수 있을 테니, 그래.

그리하여 나는 거짓말을 지어냈다네.

내 거짓말은 앞뒤가 딱 들어 맞았고,

이 슬픈 세상은

낙-원이 되었다네.


 


p.200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놀이 중 하나래요. 실뜨기 말이에요. 에스키모들도 안다더군요."

"설마요"

"어쩌면 십만 년 넘게, 어른들이 아이들 얼굴에 대고 얽힌 실을 흔들어왔을 거에요."

"음."

 뉴트는 여전히 의자에 웅크리고 있었다.그는 물감 묻은 두 손을 그 사이에 고양이 요람이라도 걸려 있는 양 옆으로 내밀었다. "아이들이 서서히 미쳐간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죠. 고양이 요람이라는게 두 손 사이에 있는 X자 다발에 불과한데도, 꼬맹이들은 그 X자를 보고, 보고, 또 보고......"

"그런데요?"

"그런데, 빌어먹을 고양이도 없고, 빌어먹을 요람도 없죠."


 


p.207~211

 "오래전 보코논과 매케이브가 이 비참한 섬을 장악했을 때, 그들은 성직자를 모조리 쫓아내버렸소. 그런 다음 보코논이 냉소적이고 장난스럽게 새로운 종교를 하나 만들어냈지." 줄리언 캐슬이 말했다.

 "알고 있어요" 내가 말했다.

 "음, 어떤 정치적 혹은 경제적 개혁으로도 국민들의 비참한 상태를 그다지 개선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이 명확해지자, 그 종교가 유일하고 실제적인 희망의 수단이 되었소. 진실이 워낙 끔찍했기 때문에, 진실은 오히려 사람들의 적이 되고 말았지. 그래서 보코논은 책임지고 사람들에게 더욱더 그럴듯한 거짓말을 제공했소."

 "그 사람은 왜 도망자가 되었나요?"

 "보코논 본인의 생각이었소. 그가 매케이브한테 자신을 추방하고 자신의 종교를 불법화하라고 요구했소. 국민의 신앙생활에 좀더 많은 열정과 자극을 부여하기 위해서였지. 그건 그렇고, 보코논이 그 일에 관해 짧은 시를 하나 지었소."

 캐슬이 그 시를 들려주었다. 그 시는 <보코논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하여 나는 정치에 작별을 고했네.

그리고 이러한 이유를 댔다네.

정말로 좋은 종교는

반역의 형태를 띠어야 한다고.


...

"하지만 보코논이 잡힌 적은 없죠?" 내가 물었다

"매케이브가 그 정도까지 미치지는 않았소. 그는 기를 쓰고 보코논을 잡으려 한 적이 없지. 잡으려고 했다면 쉽게 잡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왜 잡지 않았나요?"

"매케이브는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 대적해 싸울 성자가 없으면 자기 자신도 무의미해진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소. '파파' 몬자노도 그 사실을 알고 있고."


 


p.270

 그러나 나는 권력의 자리에 성자를 앉히는 것만으로는 천년 왕국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곳에는 모두가 먹을 좋은 음식이 풍부해야 하고, 모두가 살 근사한 집이 있어야 하고, 모두를 위해 좋은 학교와 좋은 위생과 좋은 경제가 있어야 하고, 모두가 원하는 좋은 직장이 있어야 했다. 보코논과 나는 그런 것들을 제공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선과 악은 분리되어 존재해야 했다. 선은 밀림에, 악은 궁전에. 그런 상황이 주는 위안, 그것이 우리가 국민에게 제공해야할 전부였다.


 


p.297

 호니커의 자녀들은 아이스-나인을 사유재산으로 나누어 가지면서, 누가 어떤 식으로 그 이유를 정당화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은 아버지의 뇌 늘리기를 떠올리며 아이스-나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했지만, 윤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p.340

"젊은이, 나는 <보코논서>의 마지막 문장을 생각하고 있다오. 이제 마지막 문장을 쓸 시간이 됐거든."

"잘돼가나요?"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나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내가 읽은 내용은 이러하다.


 지금보다 젊다면, 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다룬 역사서를 쓰리라. 그리고 메케이브산 정상에 올라 그 책을 베고 누우리라. 그런 다음 인간을 조각상으로 만드는 청백색 독극물을 땅에서 조금 집으리라. 그리고 자리에 누운 채로, 소름 끼치도록 히죽히죽 '그분'을 비웃으며, 스스로 조각상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