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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3 밤으로의 긴 여로. 유진 오닐

 

자전적 희곡이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 자체를 살펴보기에 앞서, 유진 오닐의 삶에 대한 간략한 서술이다.


<유진 오닐은 1888년 뉴욕 브로드웨이의 한 호텔 방에서 연극배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배우로 있는 유랑 극단을 따라 호텔 방과 기차와 무대 뒤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오닐은 1906년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하지만 이듬해 자퇴하여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리고 자살을 기도하는 등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1912년 결핵으로 입원한 요양원에서 스트린드베리와 입센을 읽고 극작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확인하고 극을 쓰기 시작하여, 1936년 노벨상 수상을 정점으로 셰익스피어와 버나드 쇼 이후 가장 널리 번역되고 상연되는 극작가로 자리매김했지만, 이후 평단의 혹평에 직면하여 작품 발표를 중단하며 현실 무대에서 잊혀 갔다. 이후 오닐은 침묵과 병고 속에서 미발표 희곡들을 집필했으며, 1953년 보스턴의 한 호텔에서 사망했다>


 호텔에서 태어나 호텔에서 죽은 극작가로, 불우한 가정사를 그대로 작품에 옮겨왔다고 보면 되겠다. 아내 칼로타는 오닐이 이 작품을 쓰는 동안 "들어갈 때 보다 십년은 늙은 듯한 수척한 모습으로, 때로는 울어서 눈이 빨갛게 부은 채로" 작업실에서 나오곤 했다고 술회했다. 나는 이 작품을 죄에 묶였던 가족들을 용서하고 용서받고자 쓴 속죄의 희곡으로 풀어보려 한다.


 이 희곡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4명의 가족간 대화를 통해 서로에게 죄를 지어온 과거를 보여준다. 아버지 제임스 티론은 메리와 결혼 후 유랑 배우로서의 여정에서 인생동안 메리를 외롭게 했고, 셋째인 에드먼드를 낳았을 때는 싼값의 돌팔이 의사를 데려와 결국 메리를 모르핀 중독자가 되도록 만든다. 메리는 마약 중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으로 가족에게 죄책감을 떠올리게 만든다. 재활원에도 가보지만 결국 마약을 끊지 못하는 건 본인의 의지 문제이기도 해서, 관절염을 핑계로 가족들을 속이고 계속 마약에 손댄다. 큰아들 제이미는 방탕하게 살며 어릴 적에는 둘째 유진에게 홍역을 옮겨 사망에 이르게 하였고 현재는 셋째 에드먼드의 재능을 질투한다. 셋째 에드먼드는 태어나며 메리를 마약 중독자로 만들었고, 뒤틀린 가족에 대해서 괴로워하며 가출도 해보고 자살도 기도하지만 결국 가족에게 되돌아온다. 본격적인 불행(메리의 마약 중독)은 에드먼드의 탄생과 함께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에드먼드는 가족들에게서 차례로 '네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하는 원망을 듣는 입장이다. 자신의 존재를 원망하는 가족들, 도망도 가보고 자살 시도도 해보지만 결국 가족의 품으로 계속 돌아오는 자신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고 상처를 입었다. 


 그 가족들은 하나하나 먼저 세상을 떠나고, 이제 불행의 씨앗이라 불리는 막내만이 살아서 과거를 돌아보고 있다. 보통은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가족이, 왜 에드먼드에게는 서로를 떠나지도 못하고 상처주며 불행을 묻게되는 사이가 되는지 일부러 '없었으면 하는 존재'가 되어(유진이 아닌 에드먼드의 이름으로) 이해해보려고 애쓴다. 왜 상처를 주었는지 극 중에서 직접 물어보기도 하고 배역 스스로가 말하게도 시키면서(제이미 : 난 네가 성공하는 게 싫었어. 그러면 비교되서 내가 더 한심하게 보일 테니까. 네가 실패하기를 바랐지. 항상 너를 질투했어... 그리고 네가 태어나서 어머니가 마약을 시작한거야. 네 탓이 아니란 건 알지만 그래도. 빌어먹을, 너에 대한 증오를 억누를 수가...! p.207) 가족들 사이에는 지녀서 안 된다고 여겨지는 수치스런 감정들을 모두 내뱉는다. 또한 에드먼드도 그동안 상처받고 섭섭했던 마음과 차마 내비치지 못했던 분노까지도(에드먼드 : ...사랑한다는 말은 잘도 하면서... 얼마나 아픈지 말하려고 하면 들어주지도 않고... (의자에서 일어나 선 채로 비난하듯 어머니를 노려보며, 모질게) 가끔은, 마약쟁이 어머니를 둔 게 너무 힘들어요! p. 145) 거침없이 표현한다. 낮에서 밤으로 시간이 이동할수록 메리의 마약 중독 증세인 환상이 커질수록, 부끄러워하는 현실을 가린 베일이 한꺼풀씩 벗겨지고 솔직한 감정들 속에 화해를 위한 클라이막스로 치닫는다.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희곡의 형식을 빌어 전지적 시점에서 각 인물들의 삶과 입장을 넘나들며 까발려놓고 보니 티론 가족 안의 에드워드였을 때는 스스로만 비참하고 절망적이라서 보이지 않았던, 제임스의 가난에 대한 두려움, 메리의 외로움, 제이미의 질투가 보이기 시작한다. 살아 생전에는 덮어놓고 입에 담는 것도 죄악시하며 숨어서 서로의 탓인줄 알고 비난하며 괴로워했는데, 한 걸음 멀리서 보니 잘못했지만 애정이 있었고 비난했으나 감싸주려 했던 모습도 보인다. 이해가 되기 전과 후로 가족에 대한 인식의 차원이 달라지는데, 이해 전에는 상대방의 행동이 답답하고 멀어보이고 화가 나지만 이해 후에는 공감이 되고 연민이 생기고 끝내 용서가 된다. 유진 오닐이 유작으로 이 희곡을 쓰게된 데에는 본인이 가족들을 이해해보고 싶었고, 관객들도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과 작품관을 이해해주고 기억해주었으면 바랬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이는 추후에 자세히 다루겠다). 그러므로 이것은 본인이 가족의 불행의 씨앗이 아닌걸 증명하기 위한 글쓰기가 아니라, 생에 마지막에 가족들을 용서하고 속죄하고자 쓴 희곡이다. 희곡의 목적인 이해와 용서 후에는 메리의 '난 제임스 티론과 사랑에 빠졌고 얼마 동안은 꿈같이 행복했지. p.221' 독백으로 극이 마무리 된다. 저녁 식사 때까지 남편과 아들들을 원망'했었던' 메리의 입을 빌어, 유진 오닐은 불행은 그저 운명이 이끈 것이니 서로 지은 죄에 자꾸 속박하지 말고 이제 자유로워지자는 선언을 한다.


"메리 : ...운명이 저렇게 만든거지 저 아이 탓은 아닐거야. 사람은 운명을 거역할 수 없으니까. 운명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손을 써서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하게 만들지...p. 72"

"메리 : ...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걸 이해하려고 애쓰지도 말고 어쩔 수 없는 일을 붙잡고 씨름하지도 말아요. 운명이 우리에게 시킨 일들은 변명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거에요. p.99"


 작품을 읽고 리뷰를 쓰면서 영화 어톤먼트(제목 그대로 속죄이다)가 여러번 생각났는데, 간단하게는 소설가로 성장한 동생이 사랑했던 한 연인을 되살려내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다 죽었다는 식으로 소설을 쓴 것이다. 두 작품은 산자가 망자에 대해서 속죄하는 방식으로 '글로 꾸며내기(창작)'가 공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산자의 입장에서 위치를 바꿔 망자의 입장에 서보고 말을 시켜보고 다시 산자와 대화하게 만들면서 글로써 산자와 망자 모두를 위한 있음직한 이야기를 탄생시킨다. 이 행위는 산자 마음속의 짐을 덜기 위함인가? 혹은 그보다 숭고한 의미를 갖는 위로의 속죄인가? 망자는 말이 없고 속죄 자체를 그저 산자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 죄를 덜기 위해 돌파구를 찾는 행위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창작의 계기가 죄의 기원을 따지기보다 행복했던 시절을 꾸며내기라도 하여 존재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는 이기심도 변명도 초월한 경지에 있다. 특히 자신이 가진 최고의 재능으로 속죄한다는 점에서 - 종교적으로도 가장 좋고 값진 것들을 신에게 바치며 용서를 바라는 것과 같은 맥락 - 진심으로 화해와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또한, 현실에 기반한 창작을 통해서 앞으로 관객들이 기억할 오닐 가족은 유진 오닐의 기억 속 불행한 모습이 아니라 그 불행함 속에서도 애정을 발견하고 화해하려 했던 모습일 것이다. 그러므로 속죄는 이해와 공감에 닿는 것이 1차이고 운명이 죄를 씻어가 주었듯 창작으로 죄에서 인물들을 영원히 자유롭게 해주는데까지 미치는게 2차적 의미라고 생각한다. 관객들이 불행한 가족들의 선택과 처지에 공감하고 연민을 느낀 후에 이건 단면이 아닌 얽히고 설킨 운명의 입체적 실타래라는 걸 깨닫도록 만드려고 유진 오닐은 힘든 자기고백을 창작한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 상황을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건 가족에 대해 남아있는 애정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의지이다. 비난과 원망에서 그칠수도 있었던 가족에 대해서 이렇게라도 '왜'를 이해해 보려했던 의지, 가장 내밀한 모습까지 관객들 앞으로 끌어올려 사후 25년간은 발표하지 말라고 했던 희극이자 곧 현실,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어 영원히 자유로운 영혼으로 남게 해주고싶었던 가족에 대한 속죄까지 'Long day's journey into night' 속 여정을 풀어보았다.